
감탄사가 그립다 -이해인 수녀님 -
얼마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.
초록빛 산과 들, 고요한 강(江)도 아름다웠지만 하늘에 펼쳐진 저녁노을이 장관이어서 나는 속으로만 탄성을 질렀다.
할 수만 있다면 벌떡 일어나 “여러분, 저기 저 노을을 좀 보세요. 사라지기 전에 어서요!”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.
이미 인터넷 문화와 기계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에겐 하도 놀랍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정작 감탄하고 놀라워해야 할 일에는 무디어진 것 같다.
좋은 것을 보아도, 아름다운 것을 느껴도 우린 그저 당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에 때론 좀 호들갑스럽게 여겨지더라도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.
사소한 일에도 어머나! 어쩌면!” 세상에!”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표정이 환해지는 그런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며 옆 사람까지 유쾌하게 만든다.
독자나 친지들이 정성스레 마련한 멋진 선물을 받고도 나의 감탄사가 약해 상대를 실망 시킨 경험도 있고, 반대로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할 적마다 엷은 슬픔과 허무의 감정에 젖어 들곤 했다. 나의 어머니는 매우 과묵한 편이었지만 감탄사의 여왕이기도 하셨다. 한번은 내가 서울에 간 김에 잠시 들러 후암 시장에서 산 꽃무늬 고운 여름 이불을 하나 선물하니 원 세상에! 이렇게 예쁜 이불도 다 있네. 잠이 저절로 올 것 같다!”하며 기뻐하셨다.
어머니가 날더러 찾아보라 하셔서 50여 년 만에 찾은 내 어린 시절의 소꿉 동무와 전화 연결을 시켜드렸을 때는 정말 반갑네! 하도 오랜만이라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을 만난 느낌이 다 드는구나. 우리 한번 만나야지?” 하셨다. 만나기만 하면 내 태몽과 어린 시절 얘기를 즐겨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
내가 한창 재롱 부리던 아기일 적엔 하도 좋다, 좋다.” 손뼉을 치며 즐거워해서 집에 오는 손님들이 “넌 만날 무에 그리 좋으냐?”며 ‘ 좋다’라는 별명을 붙인 그 아기를 서로 먼저 안아 주려고 했다고 한다. 늘 상 절제와 극기를 미덕으로 삼는 수도자의 신분이다 보니 그동안 감탄사를 너무 많이 아끼며 살아온 듯하다.
어린 시절의 그 밝고 긍정적인 감탄사를 다시 찾아 나의 남은 날들을 더 행복하게 가꾸어 가야겠다.
한숨을 웃음으로, 거친 말을 고운 말로, 불평을 감사로, 무 감동을 놀라움으로 바꾸어 날마다 희망의 감탄사가 끊이지 않은 ‘좋다’ 수녀가 되리라 마음먹으며 활짝 웃어 본다. |